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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 폐지되더라도 상폐값은 내고 가야지
상장폐지, 좋습니다. 잘 가세요.
주주를 동업자로 대할 생각이 없는 회사까지 주식시장에 붙잡아 둘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나가야 합니다.
“상폐값은 내고 가야지. 어디를 그냥 가려고.”
시가총액 기준을 강화해 기업을 퇴출하는 정책을 두고 “돈도 많고 자산도 튼튼한 회사를 주가가 낮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까진 하지 않습니다.
현금과 부동산에서 부채를 빼고 남는 순자산이 1,000억 원인 회사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총이 300억 원입니다. 이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왜 이런 부자 회사를 쫓아내느냐”만이 아닙니다. 그 많은 재산이 있는데, 왜 일반주주는 그 가치의 일부조차 자기 몫으로 기대하지 못하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쌓아 둔 돈을 20년 동안 어디에 쓸지 설명하지 않고, 투자 성과도 보여 주지 않고, 돌려줄 계획도 없는 회사라면 투자자는 그 돈을 할인해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장할 때는 함께 잘살자고 합니다. 돈을 받고 나서는 기다리라고 합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기다리라고만 하면, 그게 동업입니까? 이런 회사까지 시장에 붙잡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내보내는 게 나을지도요.
물론 주가가 낮은 회사가 모두 이런 회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회사마다 사정은 다릅니다. 다만 회사를 내보내기로 했다면, 그 퇴출이 일반주주와 지배주주에게 각각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도 봐야 합니다.
회사가 나갈 때, 왜 일반주주의 몫만 헐값이어야 합니까?
최근 시가총액 미달로 상장폐지되는 회사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일정실업은 이미 시장을 떠났고, SHD와 세진티에스도 정리매매에 들어갔습니다.
상장폐지가 된다고 회사의 현금과 땅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최대주주는 회사를 계속 운영합니다. 일반주주에게는 팔기 어려운 주식이 남습니다.
먼저 상장폐지된 일정실업을 보겠습니다. 그해 상반기, 최대주주 고동수의 자녀 세 명이 가진 지분은 13.43%에서 24.20%로 늘었습니다. 10.77%p 증가입니다. 2025년 사업보고서, 2026년 반기보고서
고태원·고민지·고나현 세 사람의 보유주식은 합계 646,022주 늘었습니다.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전체 지분은 62.19%에서 75.44%로 커졌습니다.
정리매매 기간인 6월 24~29일에 고민지와 고나현이 산 주식의 취득단가는 주당 535~686원이었습니다.
일반주주는 상장폐지 이후의 환금성 악화를 걱정해야 하는데, 최대주주 가족은 그 과정에서 지분을 더 확보했습니다. 일반주주의 선택지가 좁아지는 일이 지배주주에게는 매수 기회가 되는 구조라면, 누구를 위한 퇴출일까요?
최대주주에게 양심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니까요.
다만, 이것이 올바른 인센티브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을 열어 둔 정책 당국과 거래소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회사를 내보낼 조건은 만들면서, 남겨질 주주의 몫을 지킬 장치는 없었습니다.
시장을 바로잡겠다는 퇴출 제도. 이 제도를 본 몇몇 회사의 지배주주는
"나도 고민이 많았는데 정말 땡큐!"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도를 만든 쪽도 자존심이 상할 일 아닙니까?
상폐값을 치뤄야 합니다. 회사가 시장을 떠날 때, 일반주주의 몫을 어떻게 지킬지도 함께 책임지라는 겁니다. 나가고 싶은 주주에게는 공정한 가격으로 나갈 기회를, 남는 주주에게는 회사 정보를 얻고 지분을 거래할 실질적인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회사마다 재산과 지급 능력이 다르니 보호 방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공정한 매수 기회가 필요한지,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거래 지원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경우에는 무엇을 갖춰야 하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 조건과 책임을 정하는 것이 당국과 거래소의 일입니다.
이 문제를 법과 제도로 다뤄야 합니다. 정리매매에 던지거나 환금성이 떨어진 주식을 붙들고 남는 것 말고도 실질적인 선택지가 있어야 합니다. 장외 거래 지원이나 이전상장 같은 보완책도 나왔지만, 그것이 일반주주에게 충분한 선택지를 주는지는 따져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일정실업이 나오기 전에 구멍을 메워야 합니다.
오늘(10월 2일) 법원이 주연테크의 상장폐지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주연테크의 가처분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본안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상장폐지결정의 효력을 멈추고 정리매매도 진행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정리매매 중이던 다른 회사들의 거래도 함께 멈췄습니다. 아마도 주연테크의 가처분 인용이 다른 회사들의 정리매매에도 제동을 건 것으로 보입니다.
제도를 손볼 시간을 조금 벌었습니다. 법원이 멈춰 세웠다고 당국과 거래소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퇴출 기준의 적용 여부만 검토하고 끝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주주의 현금화 기회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지배주주에게는 어떤 기회가 생기는지까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몇 곳을 퇴출했는지만 세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의 돈이 누구에게 넘어가는지도 봐야 합니다. 일반주주의 선택지는 좁히면서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는 구멍을 방치한다면, 투자자 보호라는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다시 바로잡을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그 구멍들을 제대로 메워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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